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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최근 아주대학교 병원의 이국종 교수와 함께 아덴만의 여명작전과 당시 총상을 입었던 석해균 선장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아덴만의 여명작전에 대해 다시 관심이 쏠리고 있는데요. 오늘은 아덴만 여명작전과 당시 사건을 둘러싼 논란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011년 1월, 우리나라 1만톤급 삼호 주얼리호가 아프리카의 아덴만에서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를 당하게 됩니다. 당시까지 해적에게 우리 선원이 인질로 잡힌 경우 구출작전을 성공한 사례는 단 한차례도 없었다고 하는데요. 이 당시 대한민국 특수부대가 최초로 아덴만에서 우리나라 선원들을 구출해냅니다. 당시 한국인 8명 미얀마인 11명 인도네시아인 2명 총 21명의 선원이 전원 구출되었습니다. 


당시 구출작전은 1차와 2차 작전으로 나뉘어졌었는데요. 주변에서 훈련 중이던 최영함이 즉시 구출을 위해서 삼호주얼리호로 출발을 했었고 이틀 뒤 주얼리호의 30km까지 접근을 했습니다. 


하지만 1차 작전은 대통령의 승인 없이 소말리아 해적 4명이 보트를 타고 인근의 몽골선박을 피납하기 위해서 내려오는 과정에 링크헬기로 저격을 하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후 해적들이 모선과 합류하리라는 첩보를 받고 합참의장이 국방부장관에게 승인을 받고 당시 대통령이던 이명박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서 여명작전을 실행합니다. 당시 UDT 대원들이 진입하여 8명을 사살하고 5명을 생포했습니다. 


이로인해서 과거 선원들에게 굴욕적인 딜을 해줘야했던 것에 대한 국민들의 아쉬움 등을 씻어낼 수 있는 사건으로 남았고, 당시 심한 부상을 입었던 석해균 선장의 치료를 위해서 아주대 병원의 이국종 교수가 외상 치료를 해내면서 크게 이슈가 되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석해균 선장의 몸에 박힌 탄환의 일부가 우리나라 특수부대 대원의 총에서 발사된 탄알이라는 사실을 일부로 정부가 숨긴 것이 아닌가에 대한 당시 야당의 강한 반발이 있었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석해균 선장이 무사히 살아나면서 불가피했던 총격전 중의 부상으로 인식이 되고 마무리 되었었습니다. 


이후에도 외상센터에 대한 잠시동안의 관심이 있었지만 금새 또 다시 원점이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최근 다양한 사건들로 인해서 다시금 외상센터의 중요성에 대한 논란이 강하게 촉발되었었는데요. 우리나라 의료체계가 정말로 제대로 설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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