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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리나라 국악계의 거장이신 황병기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황병기 선생님의 이름은 몰라도 미궁이라는 전설적인 음악은 일반인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어서 30대 이상은 대부분 알고 있는데요. 과거 글루미 선데이와 더불어 양대 공포 음악으로 꼽히던 미궁의 작곡자십니다. 글루미 선데이가 유명한 이유는 그 노래를 듣고서 많은 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 때문인데요. 이로인해서 미궁이라는 곡이 글루미선데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돌기도 했었죠. 우리나라 황병기 선생님의 미궁이라는 음악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오싹한 노래로 큰 유명세를 끌었던 바 있습니다. 






이 노래는 층간소음에 명약이라는 식으로 인터넷에서 유명세를 탄 음악이기도 합니다. (윗집이 시끄럽게 하면 스피커를 천장에 대고 이 노래를 플레이 꾹..) 하지만 미궁이라는 곡의 약간은 코믹스러운 이미지와 다르게 이 곡은 음악적으로 상당히 실험적이며 수준이 있는 작품이라는 평이 있는 명곡입니다. 그리고 작곡하신 황병기님은 우리나라 가야금 연주자이시자 국악계의 거장이신 분이십니다. 황병기 선생님은 1936년 서울 출생이시고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학교이던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1952년 한국전쟁으로 인한 부산 피난시절인 경기중 2학년 때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배우신 것을 시작으로 경기고 3학년 때 전국 국악 콩쿨 1위를 시작으로 서울대 법대 3학년 재학시절 KBS 주최의 전국 국악콩쿨에서 최우수상을 타면서 국악계에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서울대 법대 출신이시지만 사법시험을 통한 법조계로의 진출이 아닌 서울대 음대 국악과 가야금 강사의 길을 선택하셨고, 대학 졸업 후 명동극장, 출판사 등을 거치면서 1974년에 이화여대 한국음악과의 초대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가야금 연주자로서의 본격적인 인생을 걷기 시작합니다. 소설가 한말숙씨와 부부의 연을 맺으시고 슬하에 두명의 아들과 두명의 딸을 두셨습니다. 



당시 서울대 음악대학의 초대 학장이신 현제명 선생님께서 황병기님에게 '법하는 사람은 길에 나가면 삼태기로 담아낼 정도로 많으니 네가 가야금을 하는 것이 그만큼 보배로운 일이다. 너는 가야금을 해라'라는 조언을 듣고 선택하셨다고 하는데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에도 큰 자산이 되는 선택이었네요.



1962년 서정수 시인의 시를 가사로 차용한 '국화 옆에서'와 가야금 독주곡인 '숲', '침향무', '비단길' 등의 다양한 종류의 창작곡들로 본격적으로 연주자와 작곡자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1975년 명동 국립극장에서 대표작인 '미궁'을 초연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창작을 하는데 있어서 법대를 다니면서 익힌 법학적인 사고 방식과 사물을 깊이 생각하는 방법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훌륭한 거장이 태어나는데 우연은 없는 모양입니다. 



'미궁'은 첼로 활과 거문고의 연주막대인 술대 등으로 가야금을 두드리면서 연주하고 홍신자씨 (무용인)의 우는 듯한 목소리가 더해진 파격적인 곡이었습니다. 마치 귀신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노래인데요. 이 후에 대한민국국악상, 방일영국악상, 호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후쿠오카아시아문화상 대상, 만해문예대상 등 각종 상을 수상하면서 명실 상부 우리나라 국악계의 한축을 담당하셨습니다. 



황병기 선생님께서는 뇌졸증으로 인한 치료 중 폐렴으로 인해 향년 82세로 별세하셨습니다. 누구나 한 번 사는 인생 때가 되면 떠나겠지만 황병기 선생님께서 인생을 멋지게 사신 것처럼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분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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